[경제플러스=송성훈 기자] 한국 재계를 대표하는 거목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5일 새벽 4시 서울 강남구 일원동 서울삼성병원에서 향년 78세로 별세했다.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증으로 서울 이태원동 자택에서 쓰러진 뒤 6년 5개월만이다.

삼성은 이날 이건희 회장의 별세 소식을 알리며 "고인과 유가족의 뜻에 따라 장례는 간소하게 가족장으로 치르기로 했으며, 조문과 조화는 정중히 사양한다"고 전했다. 정확한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부인 홍라희 여사와 이재용 부회장 등 가족들은 전날 이건희 회장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을 찾았으며 함께 고인의 임종을 지켜본 것으로 전해졌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에 차려졌으며 28일 오전 발인한다. 장지는 부친인 이병철 회장과 모친 박두을 여사가 묻혀 있는 용인 선영으로 알려졌다.

고인은 2014년 5월 10일 밤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자택에서 급성 심근경색을 일으켜 병원에서 심폐소생술(CPR)까지 받고 소생해 치료를 이어왔다.

이후 자가호흡을 하며 재활치료를 받아왔으나 끝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자가호흡이 돌아온 뒤부터 최근까지 산소호흡기 등 기계장치 없이 지내왔다는 게 삼성의 전언이다.

고인은 선친인 호암(湖巖) 이병철 삼성 창업주 별세 이후 1987년 삼성그룹 2대 회장에 올라 삼성그룹을 이끌었다.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이병철 회장과 박두을 여사의 3남 5녀 중 일곱번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난 이건희 회장은 경남 의령 친가로 보내져 할머니 손에서 자라다 1947년 상경해 학교를 다녔고 1953년 선진국을 배우라는 부친의 엄명으로 일본 유학을 떠났다.

일본 와세다대학 상학부와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뒤 1966년 서울대 응용미술과에 재학 중이던 홍라희 여사와 만나 이듬해 결혼했다.

1970년대 이 회장은 미국 실리콘밸리를 누비며 하이테크 산업 진출을 모색했고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삼성그룹 후계자로서 경영수업을 시작했다.

삼성의 해외사업추진위원장을 맡아 유공 인수전에 뛰어들었으나 쓰라린 실패를 맛본 이 회장은 삼성 경영권을 승계하기까지 20여년간 우여곡절을 겪었다.

애초 그룹 경영권을 물려받은 형인 고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이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호암의 눈밖에 나면서 이 회장이 후계자로 낙점됐다.

1987년 이병철 창업주 별세 이후 그룹회장에 취임한 고인은 1993년 '신경영 선언'을 통해 초일류 삼성의 기틀을 닦았다.

이 회장은 삼성가 분할이 거의 완료된 뒤 삼성전자 임원들을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소집해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유명한 발언을 남기며 제2의 창업을 선언했다.

이후 삼성전자는 품질경영, 질경영, 디자인경영 등으로 대도약하며 지금의 일류 기업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회장은 남다른 집념으로 삼성을 키웠다. 1987년 1조원이던 시가총액을 2012년 390조원대로 40배나 성장시켰고 총자산 500조원의 외형을 만들었다.

2006년 글로벌 TV시장에서 일본 소니를 제치고 세계 1위를 차지했고, 애플을 따라잡고 스마트폰시장 1위를 달성했다. 메모리 반도체를 포함해 20여개 품목의 글로벌 1위를 일궈냈다.

이 회장은 스포츠계에서도 족적을 남겼다.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재계·체육계 건의로 단독사면된 이 회장은 2010년 경영일선에 복귀했고 조직 재정비와 삼성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헌신했다. 삼성전자가 카피캣의 오명을 씌운 애플을 추월하는 데도 고인의 집념이 큰 역할을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사위 김재열 삼성경제연구소 사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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